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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소박하고 순수한「마에스트로」

정명훈 기사(월간조선 | 2005/07/02

주변 사람들은 그를 「마에스트로 鄭」이라고 불렀다. 이탈리아語 마에스트로는 大家(대가), 巨匠(거장)이란 뜻이다. 세계적인 음악가 鄭明勳(정명훈·52)씨에게 어울리는 존칭이었다. 나는 일본에서 鄭씨를 만나 3박4일을 동행하면서 모두 세 차례 가슴 뭉클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20여 년이 넘는 기자 생활과 세파 탓인지 내 마음은 웬만한 일에는 무감각한 편이다. 그러나 鄭씨와의 만남은 얼음 같은 내 마음 한구석을 (잠시겠지만) 감미롭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첫 번째 뭉클함은 그가 명망에 비해 훨씬 소박하고 솔직담백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였다. 요즘은 세상이 어떻게 변해서 그런지, 나이도 젊고 세상 경험도 짧은 사람일지라도 국제정치에서부터 비즈니스·역사·철학, 심지어 선·악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단순명쾌하고 확고한 주견을 자랑하곤 한다. 그러나 鄭씨는 『어떤 이들은 몇 분 안에 악보를 외워 버리지만 나는 100번을 봐야 외울 수 있는 정도의 재능』이라고 했고,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아직도 늘 의심이 많고 헤매는 기분』이라고 토로했다. 세계는커녕 한국의 작은 무대에서 순간적인 성공을 거둔 이들도 만나서 대화를 나누면 흔히 겸손한 척, 또는 잘난 척을 하는 등 인간적인 「때」를 발견하지만 鄭씨에게서는 있는 그대로의 순수성이 느껴졌다. 두 번째는 『인생의 목표가 세속적 성취가 아니라, 후진을 길러내고 인간적으로 겸손·순수해지는 것』이라고 토로할 때였다. 나아가 『늙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사는 것은 소명』이라고 했다. 그 정도 大家가 되면 시쳇말로 폼도 잡고 쉴 수도 있겠지만 그는 인간적 완성을 위해 최선을 기울이겠다는 자세였다. 세 번째는 그의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 「기적」이란 표현을 썼다. 아내에 대한 찬사가 끝이 없었다. 만약 이와 똑같은 말을, 예컨대 미국의 클린턴 前 대통령이나 여느 사회 명사들이 했다면 나는 구토의 욕구를 강하게 느꼈을 지 모른다. 그러나 鄭씨에게선 진실성이 느껴졌다. 부인에게 『어떻게 그렇게 천생연분인가』 물었더니, 부인은 웃었다. 나는 이번 인터뷰 기사만큼은 내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세계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도 아내와 가정에 충실한데, 모든 면에 소홀한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번 글은 鄭明勳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는 것보다는, 그를 통해 독자들이 무엇을 느낄 것인지에 무게중심이 놓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그의 내면세계를 추적하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鄭明勳과의 첫날/4월28일] 도쿄 필하모니와 리허설 지난 4월28일 오후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 홀. 무대 위에서 도쿄 필하모니 단원 70여 명이 연습하고 있었다. 이들은 30일 도쿄에서 신칸센(新幹線) 고속열차로 1시간20분여 걸리는 휴양지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열리는 음악회를 비롯, 5월1일 도쿄 공연 등 일련의 콘서트를 鄭明勳씨 지휘로 가질 예정이었다. 당초 鄭씨는 이날 오후 1시부터 리허설을 하기로 돼 있었는데 새로 발족될 서울시향 멤버 선발심사를 하느라 한 시간 늦게 도착한다고 했다. 오후 1시55분쯤 鄭明勳씨가 콘서트 홀에 도착했다. 그는 지휘자 대기실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검은색 바지와 재킷. 재킷 속에는 하얀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鄭씨를 직접 만나보기는 처음이었지만 白과 黑이 조화를 이루는 옷차림은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鄭씨가 가장 즐겨 입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鄭씨는 지난 2월 『서울시향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킨다』는 야심찬 포부下에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를 맡기로 서울시 측과 계약을 맺었다. 1945년 탄생해 올해로 60세가 된 서울시교향악단은 鄭明勳씨의 영입을 계기로 기존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법인재단 형태의 악단 再구성에 들어갔다. 새로운 악단은 4월22일부터 공개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는데, 선발예정 인원은 총 106명인데 687명이 몰려 평균 6.4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서울시향 오디션은 어땠습니까. 『항상 오디션이 제일 힘듭니다. 못하는 걸 보면 불쌍하고, 잘하는 사람 안 나오면 답답하죠. 특별히 잘하는 사람 찾아내기가 어려워요. 100명 중 한 사람꼴이라고 할까. 파리에 있으면서 약 1000명의 싱글 오디션을 봤는데 그중에서 어느 정도 실력 갖춘 이가 10여 명, 아주 뛰어난 이는 1명밖에 발견하지 못했어요』 음악의 세계가 그토록 힘든 것인가. 세계 명문 음대를 나오고 나름대로 「일류」를 자부하는 연주자들이 즐비할 텐데 말이다. 이번 시향 수준은 어땠을까. 『과거보다는 훨씬 나아졌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울시향과의 계약기간은 3년이라면서요. 『기간은 신경 안 씁니다. 일이 긍정적으로 가면 계속 일할 것이고, 그 반대일 경우는 빨리 끝날 수도 있죠. 계약조건으로 따지던 시기는 지났습니다』 ─목표는. 『한국의 음악수준이 많이 올라갔죠.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도 한국아이들 많고, 로마 산타체칠리아 아카데미를 가면 여기가 이탈리아인지 한국인지 모를 정도로 한국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는 아직 일본보다 많이 뒤쳐져 있습니다』 ─좋은 오케스트라가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요. 『단원수준·지휘자·지원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얼마 전 시카고에 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모든 수준이 최고더군요. 외국에선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경우 처우도 대단하고 긍지도 높은데 한국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제대로 된 콘서트 홀도 없구요』 『이명박 시장과는 잘 맞아』 ─李明博 시장하고는 뜻이 맞는 것 같습니까. 『서로 간에 신뢰가 가장 중요한데 李시장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분이 음악에 대해 잘 아시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해주어야 하는지는 잘 판단하실 분으로 믿습니다』 오후 2시5분쯤 鄭씨가 무대로 입장하자 연습하고 있던 단원들이 가벼운 박수로 그를 맞았다. 일본말로 짧게 인사를 나눈 뒤 鄭씨는 『단지 한 시간밖에 안 늦어 죄송하게 됐다』며 농담섞인 사과를 했다. 단원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곧바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음악은 어디서 들어본 듯 귀에 익었다. 스케줄표를 보니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 독주자는 10代 후반의 한국 소녀였다. 鄭씨는 서서 지휘 동작을 아주 크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앉아서 섬세하고 리드미컬한 제스처를 보이는 등 전체 단원들을 자신의 페이스로 끌고 갔다. 잘 되는 부분은 건너뛰고 특정 부분의 반복연습에 주력했다. 『좀더 부드럽게, 관대하게, 민감하게…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아주 강하게, 놀랄 정도로…』 음악에서 긴장과 강·약의 조화, 감미로움 등을 강조했다. 쉬운 표현은 영어로 직접하고, 좀더 자세한 표현은 대기해 있는 일본인 통역이 해줬다. 어느덧 분위기는 「마에스트로 鄭」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鄭씨는 각 파트의 연주를 차례로 지적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소리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이날 연습을 마치고 내려온 바이올린 독주자는 영국 퍼셀학교를 다니는 한수진(18)양이었다. 그녀는 5월1일 오후 도쿄 오처드 홀에서 함께 공연할 예정이었다. 3년 전 15세 때 세계 4대 국제콩쿠르에 꼽히는 「비엔니아우스키」에서 2등으로 뽑힌 한양은 작년에 鄭明勳씨로부터 오디션을 받았다. 『오디션을 끝냈는데 鄭선생님이 한 마디도 말씀을 안 하시고 가만히 계셔서 당황했어요. 눈 감고 계시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이라고 굉장히 격려해 주셔서 마음을 놓았습니다』 그녀는 지휘자 鄭씨에 대해 『매우 카리스마틱한 분』이라고 평했다. 마에스트로 鄭의 카리스마는 이날 연습 막간 휴식시간에 만난 도쿄 필하모니 단원들도 한결같이 지적하는 점이었다. 22년간 팀퍼니를 연주했다는 가주히코 다카노(47)씨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내적 에너지가 음악을 통해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이 마에스트로 鄭이 늘 강조하는 말』이라면서 『막대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연주경력 28년의 플루트 주자 다쿠미 사이토(53)씨는 집중력을 꼽았다. 『그분과 연주하다 보면 항상 집중과 긴장을 늦출 수 없어요. 늘 「선율을 끄집어내야지 소음을 내면 안 된다」고 하시죠. 그런데 연주 시간 내내 집중을 유지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바이올린 주자 미치 미주토리(40)씨는 카리스마와 흡인력을 꼽았다. 특히 내면의 소리, 베토벤을 좋아한다고 전했다. 鄭씨 7남매의 성공스토리 鄭씨 형제들의 성공스토리는 한국 사회에서 꽤 유명하다. 鄭씨는 한국전쟁 말기인 1953년 7남매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이 중 대중에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鄭트리오」란 이름으로 함께 음악활동도 하는 셋째 명화(61·첼리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씨와 넷째 경화(57·바이올리니스트)씨다. 두 누나도 모두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했다. 이 밖에 첫째 명소(64·여)씨는 줄리아드 음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후 예일大 대학원을 거쳐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둘째 명근(63·CMI 대표)씨는 경기고등학교와 MIT 공대를 마치고 지금까지 사업을 해오고 있다. 명훈씨보다 두 살 위인 다섯째 명철씨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副교수로 있다가 뒤늦게 신학공부를 하던 중 6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의사인 막내 명규(50)씨는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이들 7남매를 성공적으로 키운 어머니 이원숙(87)씨는 한국에서 「조기교육의 선구자」로 꼽히는, 정말 대단한 여장부다. 1918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원산 루시여고를 거쳐 배화여고·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 東京 영양과 요리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뒤 귀국해 정준채(작고)씨와 결혼했다. 결혼 직후 동덕여고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으나 7남매 교육을 위해 소매를 걷어 붙이고 생업에 나섰다. 서울 명동에서 「고려정」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다가 1962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 참가를 계기로 全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李씨는 광복 후 어려운 시절, 시장에서 국밥장사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고난의 피란길에 피아노를 함께 싣고 갈 정도였다. 終戰 후 여름방학 때 식구들과 대천해수욕장으로 놀러 갈 때도 단 하루도 레슨을 거르지 않기 위해 선생님을 대동하고 현지에서 피아노를 조달했다. [이틀째/4월29일] 소니 회장이 私財로 지은 음악당 4월29일은 5월8일까지 휴일이 계속되는 일본 「골든 위크」의 첫날이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기온은 벌써 30℃를 윗돌았다. 이미 도쿄 시내는 야외로 놀러 떠난 사람들이 많은지 한적한 편이었다. 그러나 도쿄역은 전국 각지로 떠날 행락객들로 붐볐다. 鄭씨 일행은 다음날 공연이 예정된 가루이자와로 가기 위해 낮 12시경 도쿄역에 모였다. 12시28분 도쿄역을 출발해 오후 1시58분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에 도착하면 곧바로 「가루이자와 오가 홀」로 가 기념식수 및 개관식에 참석하고 두시간에 걸쳐 리허설을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가루이자와 오가 홀」은 소니 명예회장인 오가 노리오(大賀典雄·75)씨가 2002년 소니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면서 받은 퇴직금 16억 엔(한화 160억원 상당) 전액을 희사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때 그는 『자식도 없고 퇴직금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흔쾌히 사재를 털어 콘서트 홀을 짓게 해준 오가 회장을 위한 음악회인 것이다. 오가 회장은 도쿄 예술대학, 독일 베를린 국립예술대학 음악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한 음악도였다. 소니의 음향기기 품질 테스트를 해준 것이 인연이 돼 공동 창업주인 「이부카 마사루」와 「모리타 아키오」의 오랜 설득 끝에 음악을 함께 한다는 조건으로 1953년 입사했다. 34세의 나이(1964년)에 이사가 되었고, 1982년에는 소니 사장, 1995년에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0년에 이사회 의장을 거쳐 2003년부터 명예회장으로 지내고 있다. 그는 재임 당시 소니의 사업 지평을 家電회사에서 음악 및 영화사업으로까지 확대하고 외형을 1조 엔대에서 4조 엔대로 늘려 소니를 명실상부한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다. 틈틈이 지휘봉을 잡아 「지휘하는 경영자」로도 유명하다. 그와 鄭明勳씨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도쿄 필하모니 교향악단 회장 겸 이사장으로 취임한 오가 회장은 鄭씨에게 접근했다. 鄭씨는 이탈리아 로마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라디오프랑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 등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오가 회장이 도쿄 필하모니를 맡아 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일본 제일의 NHK 교향악단은 실력은 있는데 단원들이 딱딱하고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쿄 필하모니는 발전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변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더군요』 『저 정도의 재능 있는 음악가는 많죠』 결국 鄭씨는 2001년 4월 도쿄 필하모니 특별예술고문으로 초빙됐다. 도쿄와 서울의 음악 수준 차이가 어떤 지 궁금했다. 『오케스트라로 따지면 일본이 훨씬 낫습니다. 우선 준비를 기가 막힐 정도로 철저하게 잘합니다. 그리고 지휘자와 잘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반면 한국은 표현에서 더 뛰어난 데 비해 준비나 앙상블에선 많이 떨어집니다. 때문에 지휘하기에 도쿄가 훨씬 쉽죠』 얘기를 나누는 사이 기차는 목적지인 가루이자와에 접근하고 있었다. 나가노 현에 있는 이곳은 산악지대이며 골프장이 많은 1급 휴양지다. 가루이자와에 도착한 鄭씨는 바쁘게 움직였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바로 콘서트 홀로 와 기념식에 참석한 뒤 지방 유지 등 초대인사들이 착석한 가운데 개관 기념 리허설에 들어갔다. 검은색 연미복을 입고 나온 그가 무대 단원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자 단원들은 까르르 웃었다. 아마도 연주 전에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 위한 鄭씨 나름의 계산된 유머인 듯싶었다. 지휘자를 제외한 단원은 총 74명이었다. 이날 연주 전 복도에서 만난 단원들은 『어제 「마에스트로 鄭」이 한 시간 늦은 데 대한 벌금조로 오늘 커피와 과자 등 다과값을 냈다』며 음료를 권했다. 광복 후 한국이 나은 아티스트 하면 미술의 경우 비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씨를, 음악 하면 鄭明勳씨을 꼽는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마에스트로 鄭은 세계음악계에서 어느 레벨로 볼 수 있나요. 『저 정도의 재주를 가진 사람들은 많다고 봅니다. 또 저처럼 노력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봅니다. 제 경우 여러 요건들이 잘 합쳐진 것 같습니다. 특히 제 지휘 능력을 일찍 인정하시고 돈도 안 받고 가르쳐 주신 제이콥슨 선생님을 비롯 은사들의 도움이 컸고, 음악적 재능을 일찍감치 발견하고 격려하고 도와 주신 어머님 등의 헌신도 큰 몫을 했죠』 「번스타인은 천재」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재능은 없나요. 『학교 공부를 특별히 잘하지는 않았는데 배우는 능력에서 다른 게 있어요. 뭐냐하면 나는 강의든, 설교든 뭐든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딱 한 가지씩 남는 게 있어요. 그 남는 것 중에서 나중에 한두 가지씩 뽑아 조화시켜 나만의 것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할까요. 그것이 음악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제일 나쁜 태도는 뭐든지 그대로 배워서 따라 하는 것입니다. 비판도 없고 독창성도 없고 그대로 따라하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습니다』 ─세계적인 지휘자라면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폰 카라얀」 등이 생각나는데, 그들과 자신을 견준다면 어떻습니까. 『번스타인은 천재입니다. 그는 피아니스트에 작곡까지 합니다. 지휘만 하는 나와는 다른 레벨이지요. 내가 판단하기에 나는 딱 한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을 쫓아가려면, 꾸준히 노력·발전해 나가는 겁니다. 천재들이 한 발자국씩 쾅쾅 딛고 나간다면, 나는 굉장히 오래 걸려서 그 뒤를 쫓아갑니다. 그들은 어마어마한 재주들이 있습니다. 몇 분 안에 악보를 보고서 외워 버립니다. 나는 어떤지 아십니까. 한 100번쯤 봐야 외워집니다. 물론 일부 천재들은 너무 재능이 넘쳐 가볍다거나, 일찍 재능을 딴 데 소진하는 등 문제도 있지만…』 그는 대화가 길어질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진지해졌다. 巨匠으로서 겸손한 척이나 대가연하는 것이 아니었다. 鄭씨의 모습에선 세계 최고의 음악을 추구하는 작은 거인의 진지함, 그 노력, 투혼, 고민이 엿보였다. 鄭씨의 천재성은 이미 어려서부터 익히 세계 무대에서 알려졌다. 그 캐리어 역시 지금까지 같은 또래 누구보다 성공적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세계 최고의 巨匠들과 자신의 차이를 철저히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들과 같은 음악의 세계로 오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鄭明勳씨의 친형으로 국제적으로 음악매니지먼트 사업을 하고 있는 정명근씨는 『全세계적으로 「트리플 에이(AAA)」 평가를 받는 최상급 지휘자는 20명 선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평가방법이 워낙 복잡해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마에스트로 鄭」을 포함해 숫자는 그 정도밖에 안 됩니다. 세계적인 지휘자가 많을 것 같지만 너무나 뻔한 셈이죠. 그래서 일류 오케스트라들은 서로 좋은 지휘자를 영입하려고 난리입니다. 얼마 전 일본 음악잡지에서 세계 차세대 지휘자로 3명을 꼽아 커버 스토리로 다뤘는데 베를린 필하모니의 사이먼 래틀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극장의 발레리 게르기에프 그리고 鄭明勳을 꼽았습니다』 ─형님으로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 속속들이 꿰뚫어 보기 때문에 단점도 많이 발견할 것 같은데요. 『음악적 리더십을 내가 얘기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특이한 것이라면 명훈이는 어려서부터 성격도 세고, 「깊이」가 있었어요. 성격이 워낙 깊고 사람을 꽉 누르는 힘이 있었죠. 어린이 같지 않았으니까. 때로 상대방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어느 오케스트라를 만나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젊은 나이에 동양인이, 그것도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오케스트라 단원 100여 명을 음악적으로 이끌어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베를린 필하모니하고 공연할 때인가, 제대로 안 되니까 지휘봉을 놓고 나온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단원들이 어려워합니다. 음악에 대한 집중도나 성실성이 대단하기 때문이죠』 마에스트로 鄭과 대적할 만한 사람 아직 일본에 없다 일본에도 「세이지 오자와」라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있다. 중국 랴오닝省 선양 태생의 그는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했고 지금은 빈 필하모니 음악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10년 이상 일본內 鄭씨 활동을 도와주고 있는 하세가와 주니치(長谷川 純一)씨는 『그러나 세이지 오자와는 만 70세로 마에스트로 鄭과 직접 비교할 수 없으며, 그 밑에 연배로 마에스트로 鄭과 대적할 만한 사람은 아직 일본에 없다』고 평가했다. 『일본 사람들은 마에스트로 鄭의 카리스마를 보고 쇼크를 받았습니다. 일본인 지휘자들은 정교하긴 한데 그런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하거든요』 [사흘째/4월30일]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손수 준비해 와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 창 밖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기 때문이다. 이런 찬란한 달빛을 접해 본 지 얼마나 되는지…. 잠결에 이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곯아 떨어졌다. 산간지대의 밤은 이토록 로맨틱했다. 내가 가루이자와에서 묵는 숙소는 전형적인 일본 목조 2층집 여관이다. 「유스겐 온센」이란 이름의 이 여관은 기차역에서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의 한적한 동네에 위치해 있다. 뜰 자그마한 탕에 온천수가 나온다. 2층 다다미방에서 보이는 밖에 경치는 아름다웠다. 작은 계곡과 숲 속. 어젯밤 달빛에 취해 곤히 잔 탓인지 아침에 일찍 눈을 떴다. 4월30일 오전 6시. 낮엔 햇볕이 따갑고 더웠지만 아침엔 아주 서늘했다. 조깅복을 입고 산보를 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해발 3000m급 산에는 아직 눈이 듬성듬성 쌓여 있었다. 널찍하고 쾌적한 전원주택들. 정성들여 가꾸어진 숲 속과 주변 경관. 하수도로 흐르는 산에서 내려온 시냇물은 맑고 콸콸 넘쳤다. 아름드리 나무에다 흙은 자양분이 풍부한 듯 검고 진했다. 마치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의 교외 별장지대를 그대로 옮겨 온 듯했다. 이날 메인 공연은 오후 5시. 그러나 1시부터 리허설에 들어가고 나는 낮 12시경 鄭明勳씨와 만나기로 돼 있었다. 택시를 타고 콘서트 홀로 가는 도중 길은 행락객 차량들로 꽉 차있었다. 일제 스포츠카를 비롯 全세계 갖가지 고급차들이 행렬을 이뤘다. 그러나 워낙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조용하게,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여지고 있었다. 낮 12시 콘서트 홀에 들어가 지휘자실 입구에 서성이니 鄭씨 일행이 곧 나타났다. 이날 인터뷰 시간은 40분으로 정해졌다. 방안에 들어가니 테이블에는 鄭씨가 점심용으로 준비해 온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살면서 가장 힘든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음악적으로 가장 힘든 시절은 열다섯 살 때 음악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뉴욕으로 가서 지낸 6년간이었습니다. 가보니 너무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고, 어떻게 여기서 이겨낼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시애틀에서 제이콥슨 선생 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지만 전력투구하지는 않았다. 어린 나이지만 全식구가 매달려 하는 식당일을 부지런히 도왔고, 틈나면 스포츠를 즐겼다. 그러다가 15세 때인 1968년 정식으로 음악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고 뉴욕 매네스 음악학교에 진학했다. 누나들이 다니는 줄리아드를 택하지 않은 것은 『내가 잘해, 네가 잘해』라는 경쟁적 풍토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훈씨는 그 역경을 모두 딛고 졸업하던 해인 1974년에는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하고, 이듬해 뉴욕 줄리아드 음대 대학원에 진학해 지휘를 전공하기 시작했다. ─쟁쟁한 친구들 속에서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제가 뭘하면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허허). 재주·노력·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지휘를 하면서 변했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줄리아드 대학원을 다니면서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한 것도 큰 운이라고 했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꿔 놓았기 때문이죠.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시절 나는 상당히 날카롭고 비관적이었죠. 피아노 음 하나하나를 원하는 대로 연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사람인 지라 실수도 있게 마련인데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였던 나는 작은 실수도 용납지 못했죠. 지휘를 하게 되면서 어둡고 고독한 음악가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변해 갔습니다. 나 한 사람이 아닌, 오케스트라 전체의 음악적 성취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복잡하고 고려해야 할 요소도 많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입니다』 그는 지휘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줄리아드 대학원에서 프리 칼리지 지휘자로 발탁됨과 동시에 뉴욕 유스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추천됐다. 뉴욕 카네기 홀에서 1년에 4회씩 정기공연을 갖고, 1980년엔 LA 필하모니 副지휘자로 일했으며, 1983년에는 유럽으로 이주해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지휘자를 맡았고, 1987년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오케스트라를 맡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9년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 겸 전임지휘자로 발탁된다. 그때 나이 만 36세. 세계적 巨匠들이 맡는 자리를 鄭씨가 차지한 것이다. 프랑스 정권이 左派에서 다시 右派로 넘어가면서 정치적 바람 등을 타고 5년 만인 1994년 바스티유 감독직을 사임했다. 이때 음악적 좌절이 심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선 그의 형 명근씨가 대답을 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죠. 최고의 음악인이 되기 위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봅니다. 명훈이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고 성장과정의 하나죠. 사업·정치하는 이들은 실패하기도 극복하기도 하지만 예술가들의 예술성이 솟았다 거꾸러졌다 하는 것은 아니죠. 명훈이의 음악적 커리어와는 전혀 관련 없는 프랑스 左·右 정치 바람 탓이었습니다』 그는 『형제 중 경화와 명훈이의 음악적 재능이 가장 탁월하다』고 했다. 『얘들은 어딜 가서도 성공할 아이들입니다. 항상 자기가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아주 높이 잡고 연주하면서 한 번도 웃어 본 적이 없었어요. 늘 울었어요. 그러나 누구 상대방과 경쟁해서가 아니에요. 바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는 데서 불만을 터뜨리는 거죠. 세계적 음악인이 가는 길이 참 묘해요. 우리나라에도 어렸을 적 신동이니 천재니 각광받는 이들이 있었지만 지금 보세요. 얼마나 남아 있는가를』 명근씨의 해석으로는 한국에서 천재들이 사그라지는 이유가 세 가지였다. 하나는 남과 비교해 1등 하려는 것. 음악에서는 이런 것이야말로 毒이라고 한다. 둘째는 좋은 대학이나 성적을 뛰어넘는 큰 목표를 가져야 하는데 한국에선 눈앞의 득실에 너무 연연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나이 먹거나, 유명해져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되는데 어느 정도 크면 대가연하고 나태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다시 鄭明勳씨에게 화제를 돌렸다. 『결혼은 내 생애 최고의 행운』 ─아까는 음악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말씀하셨는데 인간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은 언제였나요. 『결혼 전 혼자 살 때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해결이 됐습니다. 정말 결혼은 내 생애 최고의 행운입니다. 제 인생을 180도로 바꿔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음악은 내 인생에서 2순위로 밀려났습니다. 가족은 내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 준 소중한 존재이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鄭씨의 부인은 다섯 살 연상의 구순열(57)씨다. 원래는 사돈 간이었다. 1970년 누나 명화씨가 당시 컬럼비아大를 졸업하고 AP통신사 기자였던 구삼열(62·아리랑TV 사장)씨와 결혼했는데 그 여동생이 바로 구순열씨였다. 명훈씨는 사돈과의 결혼 등을 썩 좋게 보지 않는 부모님을 설득해 26세 때인 1979년 결혼했다. 鄭씨의 아내 자랑, 가족 사랑은 보통이 아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위대한 음악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장한 아버지賞」 내지 「장한 남편賞」을 수상한 평범한 家長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들은 슬하에 진·선·민이라는 아들 삼형제를 두고 있다. 그가 쓴 「마에스트로 鄭明勳의 Dinner for 8(여덟 명을 위한 저녁식사)」이란 책을 읽어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기적!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대할 때마다 나는 이들이 내 인생의 기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내 삶이 너무나 행복하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음악가라는 정체성도, 지휘자라는 사명감도 잠시 잊는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성실한 짐꾼으로, 충성스러운 요리사로 거듭난다. 그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만족스럽고 행복하다〉 ─본인 스스로 음악이 힘든 일이라고 하셨고, 힘든 일이 많이 닥쳤을 텐데 어떻게 이겨 나갔습니까. 『저는 원래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집에선 어머니가 제일 강하시고 저는 겨우 문 앞에 서서 주저주저하다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갔죠. 그러면서 기적이 계속 일어났어요』 ─무슨 기적이요. 『아내와의 결혼, 그리고 세 아들을 차례로 낳았을 때, 모두 네 번의 기적이죠』 이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나는 내 가족과의 삶을 鄭明勳씨처럼 「기적」이라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죽는 날까지 노력하는 것. 하나님 만나러가는 것. 그것이 제 소명이라고 봅니다』 ─그 같은 믿음은 꼭 크리스천에게만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특정 종교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죠. 무엇을 믿든 우리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영적인 삶이 있다고 봅니다. 그 레벨로 올라가려면 뭐라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뭐를 찾습니다. 우리가 찾는 그 무엇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세계가 아닐까요. 그런 게 없으면 아주 동물적인 삶이죠』 그는 살아오면서 항상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오는 삶을 지냈다고 토로했다. 『지휘자도 창조자가 아닌 메신저입니다. 베토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단 한 곳도 바꾸면 안 됩니다. 다만 내 음색이 다르게 나올 뿐이죠. 절대자의 뜻에 따라 음악적으로 행하는 것이 내 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힘에 끌려 오는 삶 ─본인 인생에 어느 정도 만족하십니까. 『사실 남과 비교하면 항상 날아다녀야 할 정도로 복을 많이 받고 살았죠. 그러나 타고난 성격이 긍정적이지 않다 보니 항상 날씨도 흐리고, 컵에 물도 반밖에 안 남았고 등 비관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 드렸듯이 결혼하면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나아져 갔습니다』 오후 4시50분 760석 자리는 이미 꽉 찼다. 대부분 50~60代 이상 장년층 부부들이었는데 옷차림새·동작·얼굴에서 풍기는 관록 등이 만만치 않게들 느껴졌다. 시골 유지들도 많을 텐데 확실히 한국보다 세련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로열석 맨 앞자리 중앙에 앉아보는 호사를 누렸다. 鄭씨 덕택이었다. 내 옆에 鄭씨의 큰아들 진(25)씨와 부인 구순열씨가 앉았다. 진씨는 미국 브라운大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작가를 지망하다가 지금은 잠시 홍익大에서 미술을 배우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편한 분』 이라고 짧게 답했다. 부인 구씨에게 『어떻게 해주셨기에 그토록 아내를 칭찬하느냐』고 묻자 『그이는 가족밖에 모르는 분』, 『철이 없어서 그런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남편 鄭씨가 순진하다고 했다. 『순진한 거냐 순수한 거냐』고 반문하자 『둘 다』라고 답하며 다시 웃는다. 이날 첫 곡은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 연주가 잘 끝났다. 청중 곳곳에서 『브라보』를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왔고 鄭씨는 만면의 웃음을 짓고 세 차례의 박수를 받았다. 부인 구씨도 『좋았어요』라고 했다. 『다른 때 연주와 다른 점은 뭐냐』고 묻자 『우린 해설 안 하고 그저 즐길 뿐이에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두 번째 곡 베토벤 교향곡 제3번 「영웅」은 아주 열정적인 모션으로 시작했다. 마치 전투사령관 같았다. 관악기 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더 크게 내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絃(현)파트는 鄭씨의 움직임에 따라 머리가 함께 움직이곤 했다. 단원들은 그의 손동작, 눈빛, 지휘봉에 집중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단원들이 엄청나게 긴장하고 집중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때로는 폭풍우 속을 헤쳐나가는 구축함 선장 같았고, 연인들을 태운 나룻배 사공 같기도 했다. 2악장 연주는 큰 긴장 속에 기침 소리 하나 나지 않았고 鄭씨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기도 했다. 연주회가 끝난 후 박수소리 속에서 鄭씨는 자신에게 온 꽃다발을 들고 관중석으로 걸어와 이날의 주인공 오가 회장에게 건넸다. 주위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흘째/5월1일] 좌우명은 좀더 잘 하겠다는 것 5월1일 오전 8시50분 가루이자와 역 앞. 전날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나서 그런지 鄭씨의 얼굴은 매우 홀가분해 보였다. 일행은 오전 9시4분發 도쿄行 신칸센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저녁 공연에 대비해 낮에는 또다시 리허설이 준비돼 있다. 도쿄 필하모니 단원들은 전날 저녁 공연이 끝난 후 바로 도쿄로 돌아갔다. 열차가 출발하자 잠시 후 鄭씨는 내 옆 자리로 옮겨 앉았다. 추가 인터뷰에 응해준 것이다. ─인생에 좌우명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음악가나 연주자로나 이 정도 했으면 성공했다고 만족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면 좀더 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거죠. 사람들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기왕 하는 일을 좀더 잘하려고 하는 타입이죠. 모든 것이 그래요. 사람들도 새로 사귀고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는 사람을 또 만나 더 깊이 사귀는 것이 내 스타일이죠』 그는 한마디로 성실한 사람이다. 또 진지하다.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한창 치열하게 삶을 사는 30代의 젊음과 에너지, 팽팽한 비판의식을 만나게 된다. 이런 식의 젊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향후 10년이 아니라 족히 20~30년은 더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음악가로 두 사람을 꼽았다. LA 필하모니에서 일할 때 상임지휘자로 있던 이탈리아가 낳은 세계적 지휘자인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91)와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97)이 그들이다. 『줄리니는 성직자 같은 분이고 메시앙은 성인 같은 분입니다. 살아 있는 본보기죠. 그분들같이 겸손한 분들을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까지 겸손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 말이에요. 내가 그분들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하여튼 노력하고 있습니다.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내 인생목표입니다』 ─그 겸손함을 음악적 성취와 연결시킨다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음악에서 찾는 것은 순수함입니다』 그는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할, 적당한 한국어를 찾는 데 힘들어했다. 『순수하려면 단순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죠. 나이 먹어서도 순수해지려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음악은 심플해집니다. 그러나 단지 심플하기만 한다면 그건 최고 음악이 아니죠. 겉으로는 굉장히 심플하면서도 속으로는 「리치(풍부)」한 음악이 진짜죠. 음악도 들어보면 처음에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점점 들어볼수록 뜻이 있는 것, 그런 음악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아세요』 그는 인생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겸손함도 선천적인 것이라고 봐요. 아마도 메시앙은 자신의 겸손함에 대해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을 거예요. 그러나 나는 의심이 들지 않을 때가 없어요. 늘 헤매는 기분이죠. 모든 것에 대해… 아까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갖고 음악을 해야 된다고 했는데 그것만 갖고는 안 되죠. 밸런스(균형)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평생 노력을 해야 합니다. 희망을 갖고 일찍 시작을 해야 되구요』 『느리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앞을 향할 것』 그는 요즘 들어 줄리니 같은 위대한 지휘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음악풍토를 걱정했다. 『연주자는 운동선수와 비슷해 젊은 나이에 완벽한 기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휘자는 젊은 나이에 안 됩니다. 지휘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너무 쉽습니다. 그냥 하면 돼요. 그러나 지휘자에게는 깊은 통찰력과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지휘자는 지금보다 젊었을 때 훨씬 더 기량을 잘 발휘했었죠. 그때의 그 육체적 힘을 나이 들어 영적인 힘으로 돌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함정이죠. 계속 정진해야 합니다. 나는 느린 스타일이지만 계속 꾸준한 노력으로 앞을 향할 것입니다』 鄭明勳씨가 세계 무대에 처음 이름을 알린 계기는 1974년 舊소련에서 열린 차이코프스키 국제음악 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2위(은메달)로 입상했을 때였다. 음악의 세계도 다른 인생의 길과 마찬가지로 浮沈(부침)이 심했을 텐데 그때 함께 경쟁했던 이들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그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나간다고 하니까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워낙 피아노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많은데 제 실력으론 어림없다는 거죠. 나를 아끼는 선생님들까지도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어머니께선 「네가 나가면 이긴다」며 격려하셨습니다. 정말 어머니의 「긍정적 압력」은 대단하셨습니다. 일생 살면서 제게 「왜 못 하느냐」, 「공부해라」 소리를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당시 소련은 적성국이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는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鄭씨는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이후 鄭씨는 미국 국적을 유지하다가 7~8년 전쯤 다시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당시는 美·蘇를 주축으로 한 냉전상황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라 음악회마저 체제 경쟁의 각축장이었다. 그래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1등은 이변이 없는 한 항상 소련인(러시아인)에게 돌아갔다. 콩쿠르 전에 열리는 소비에트 연방 음악회에서 1등한 사람이 당연직 1등이었다. 그런데 鄭씨가 참가한 1974년 콩쿠르에선 이변이 일어났다. 당연직 1등이 예상된 소비에트연방 음악회 우승자는 5등으로 밀려났고, 1등은 러시아인이지만 만 18세 무명의 신인에게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鄭씨가 2등의 영예를 차지했다. 3등은 러시아인, 4등은 헝가리인, 5등이 원래 우승자가 될 뻔했던 러시아인이었다. 음악 英才들의 엇갈린 인생 항로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합니까. 『그때 1등한 친구의 테크닉은 기가 막혔어요. 그 친구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는 우승의 꿈을 진작 접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음악은 거기서 멈추어 버렸죠. 그 후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됐죠. 어쩌면 1등이 그에겐 毒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의 음악은 그때가 최고였으니까요. 3등한 러시아 친구는 그때 무척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친구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왔고 텍사스州의 부자들이 후원해 주어 한동안 잘나갔습니다. 그러나 마약을 하고 폭행사건에 휘말리는 등 자기관리를 못해 결국 약물남용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4등했던 헝가리 친구 「안드라스 쉬프」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음악가인데 지금은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뿐 아니라 음악가로서도 말입니다. 5등했던 러시아인은 원래 1등 후보로 꼽힐 만큼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였고 이후에도 갈고 닦아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鄭씨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그때 나도 1등이 될 뻔했다』고 전했다. 『당시 배심원들 중에서 나를 1등으로 뽑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아 격론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때 제가 1등을 했다면 오늘의 「지휘자 鄭明勳」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너무 일찍 유명해져 연주 스케줄이 쇄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2등을 했기 때문에 제가 미련 없이 지휘공부를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거죠. 주변에선 많이들 말렸지만 말입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항상 누가 결정하고 밀어 주는 기분을 느낍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옛날보다 훨씬 더 말입니다』 ─밀어 주는 이가 神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쉽게 따라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한쪽으로는 부단히 확인작업을 하죠. 어머니께서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제일 무서웠다고 말하십니다. 워낙 말이 없고 어떤 일을 하면 끝장을 내는 성격이라. 내가 어린 시절 시애틀에서 6년간 잘 놀다가 갑자기 「음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께선 그때까지 아무 말 안 하시고 계시다가 이후 본격적으로 나를 지원해 주셨죠. 어머니의 특징은 자식들을 지켜보시다가 하겠다고 하면 바로 그때부터 계획을 세우고 모든 지원을 해주는 분입니다』 ─살아오면서 실수나 방탕, 나쁜 일을 하신 적도 있었겠죠. 『실수는 굉장히 많이 해요. 지금도. 다행히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베이스가 있어요. 어느 정도 나쁜 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죠. 내 인생에 베이스가 두 가지입니다. 가족과 음악이죠. 여덟 살 때는 피아노와 초콜릿을 가장 좋아했는데 지금은 초콜릿 대신 가족이죠』 『나를 위한 삶은 10%도 안 돼』 ─왜 가족을 「기적」이라고 하죠. 『두 사람이 결혼함으로써 한 사람이 됨에 따라 제 역할도 반으로 줄어들었죠. 점점 가족을 위해 살게 됩니다. 과거에는 나만을 위해 살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위해 사는 시간이 10%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게 편합니다』 1961년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 가 시애틀에서 한국식당을 했을 때 당시 10세 남짓하던 鄭明勳 어린이는 웨이터, 서빙, 배달, 수금은 물론 주방에 들어가 음식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 일들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내가 남을 지시하고 이끄는 지휘자란 직업을 갖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남을 돕는 조수 역할을 해도 잘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에는 그런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누구를 위해 뭘 해주는 것 말이죠. 살면서 그런 것 안 하면 괜히 죄책감이 듭니다』 鄭씨는 요리에도 일가견이 있다. 음식점에 가기보다 요리하기를 좋아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요리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고 지금까지도 요리를 인생의 활력소로 생각한다. 그는 『요리만큼은 음악처럼 프로페셔널하지 않고 아마추어라서 가능한 일이라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그가 이탈리아에 자리를 굳히고 오래 산 것도 이탈리아 파스타 요리 덕분이란다. 프랑스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미식가 프랑스 사람들 속에서 말이다. 『지휘와 요리가 참 비슷한 것은, 재료는 같아도 그 표현에 따라 확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재료를 주어도 완성되는 맛이 조금씩 다른 것처럼 오케스트라의 색감도 지휘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그가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맛까지 훌륭하다고 칭찬한다면 마치 연주회에서 청중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느낄 때와 유사한 뿌듯함이 밀려온다고 한다. 그는 혼자 연주여행을 하거나 연습할 때는 긴장이 돼 식욕이 당기지 않아 대충 샌드위치 같은 것으로 때우는 편이다. 그러나 연주가 끝난 후에는 부엌에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해 식구들과 둘러앉아 맛있게 먹노라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라고 한다. 『요리는 가족과 음악에 이어 내 인생을 풍요롭게, 일상을 행복하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내 삶에 요리가 빠졌더라면 일상의 여유와 균형을 지키며 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음악가가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요리사가 되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랬다면 지금쯤 요리를 사랑하는 음악가가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요리사가 돼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루에 한 끼는 한식을 즐긴다. 그래서 김치 담그는 것부터 매운탕, 고기찜, 감자국, 무침 등 한국요리는 기본이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요리는 이탈리아 요리.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매운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비롯 각종 스파게티, 수프, 샐러드 등이 특기다. ─한국에서 자주 가는 식당은. 『많이 다니지 않았는데 경복궁 앞 「더 레스토랑」을 좋아합니다. 외국에서 가는 식당 중 고급 집은 지금도 좀 불편한 편입니다. 파리에서도 일이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요리를 했어요』 『아내 덕에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 그는 상당히 소박한 스타일이었다. 어렸을 적 고생을 하고 자라서 그런 것 같다. 아마 그 시대 한국인들은 부자건, 가난하건 다 고달픈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鄭씨는 지금 자신의 삶이 너무 고급스럽게 보일까 봐 말조심을 했다. 예컨대 「무슨 포도주를 좋아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서설이 길었다. 『제가 프랑스에서 오래 살다 보니 먹는 것도 프랑스 취향을 많이 닮았는데 처음에는 식사 후 나오는 갖가지 치즈를 보면서 「저런 걸 왜 먹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습관이 돼서 좋아합니다. 와인도 처음에는 맛도 몰랐지만 지금은 좋아하죠.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와인 무통 로쉴드를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와인으론 고급에 속하는 사시카야를 좋아하죠』 그의 아내는 와인을 즐겨 마시진 않지만 맛에 대한 안목은 아주 뛰어나다고 한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땐가 鄭씨는 평생 처음으로 프랑스 고급 와인인 「샤토 페트루스」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저기 알아본 뒤 파리의 전문 상점에서 30% 할인을 받아 두 병을 구입했다. 저녁식사 때 아무 설명 없이 와인을 마셨는데 아내가 한 모금 마셔 보더니 『야, 정말 좋은 와인』이라고 탄성을 질렀다. 순간 鄭씨는 다음부터 아내가 그 와인만 찾으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했다고 한다. 『아내한테 정말 큰 칭찬을 받았어요. 아내는 맛이든 뭐든 안목이 대단해요. 만약 내가 혼자 살았다면 어렸을 적 살던 버릇처럼 굉장히 돈을 아끼고 싼 것만 사는 등 낮은 수준으로 살아갔을 텐데 이 사람 덕분에 모든 것이 높은 수준으로 갔죠. 생활자체가 달라졌어요』 鄭씨의 아내 예찬론은 끝이 없었다. 『한 가지에 전력투구한다』 ─살다 보면 딴 여자에게 눈길이 갈 텐데요. 『남자 치고 예쁜 여자 보고 감흥이 없다는 건 얘기 안 되죠. 그런 적 있죠. 그러나 다른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은 없어요. 언젠가 작가도 겸한다는 TV 여배우가 인터뷰에서 내게 계속 여자관계를 묻더군요. 본인도 이혼 경력이 있다는 데 도대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 내가 솔직하지 못한 걸로 생각하고 어떻게 남자가 그럴 수 있느냐고 꼬치꼬치 묻더군요. 나는 뭐든 한 가지에 파묻히는 스타일이에요. 피아노나 지휘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두 가지를 잘한다면 그중에서도 한 가지를 선택해 집중하면 훨씬 더 잘할 거라고 생각하죠. 내 인생의 성공의 열쇠는 두 가지가 아니라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는 데 있죠.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 활동하는 다니엘 바렌보임 같은 이는 연습 안 해도 피아노를 잡으면 아주 잘합니다. 그러나 나는 죽어라고 연습해야 합니다. 내 한계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에 全力을 쏟아야 승산이 있습니다』 어느새 신칸센은 도쿄에 다 접근해 가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당초 인터뷰 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데 대해 계속 시그널을 보내왔다. 스케줄표를 보면 그는 오전 10시16분 도쿄역에 도착, 바로 호텔로 갔다가 낮 12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공연이 열리는 오처드 홀에서 리허설을 갖고 오후 3시부터 공연을 갖는 것으로 돼있다. 『더 질문하고픈 내용이 많지만 이만 하겠다』고 하자 그는 『괜찮다. 더 질문해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시간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마에스트로 鄭은 다음 연주를 위해 잠깐이라도 숙고와 휴식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그는 『의문 나는 것 있으면 언제든지 또 물어 주세요』라고 친절하게 말한 뒤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도쿄 역에서 우린 헤어졌다. 鄭明勳씨와 부인, 아들, 형님 정명근씨 그리고 비서진들과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나는 나리타 공항으로 향했다. 투명하고 순수한 사람 인터뷰를 마치고 참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투명한 사람, 순수한 사람을 만나 좋은 시간을 가졌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도 미처 생각 못한 온갖 세속적 일, 잡일 등을 떠오르게 만들곤 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고 나면 왠지 더 욕심과 미련과 경쟁심이 들고 더욱 자신을 세속적 명리 쪽으로 부추기게 만들곤 한다. 반대로 鄭明勳씨의 경우는 보통 내면 속에서 잊고 있던 명징함, 투명함, 순수한 삶의 자세를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야말로 왜 살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거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생각나게 한다. 이는 그가 그만큼 치열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대면하고 있고 이를 자신이 원하는 순수한 세계로 접근시키려는 태도가 전해주는 동화력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의 모델은 줄리니와 메시앙이란 두 음악가다. 그들처럼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고 그들처럼 순수해지고 싶은 게 鄭씨의 소망이다. 『인생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태어나서 스물댓 살까지는 공부하고 성장하는 시기, 이후 예순 살까지는 그전에 배우고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원하는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시기, 그리고 이후 마지막 단계에는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경험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래서 예순 살부터는 연주활동을 줄이고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내게 남은 일들은 음악가로서, 인간으로서 내 삶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음악가로서는 미래의 청중을 길러내는 일이, 인간으로서는 순수에 가장 가까이 가는 것을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수에 가장 가까이 가기 위한 방법은 일상의 사소한 것,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귀함을 알고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이 다음에 나는 鄭씨를 또 만나고 싶었다. 그와 순수한 마음으로 사귀고픈 생각도 들었다. 이왕이면 그가 만든 음식을 와인과 함께 들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그리고 내 생애 최초로, 나도 음식을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욕구가 강력히 솟구쳤다. 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