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향 음악고문 맡은 정명훈
도쿄=김성현기자 danp | 2005/03/14세계적 수준 교향악단 키우려면 수십년 앞을 보고 장기투자해야 태국·노르웨이서 부지휘자 위촉 단원 오디션 겸해 지휘무대 설것 지휘자 정명훈(52)씨는 일본 도쿄 오페라시티에서 열리는 도쿄 필하모닉 연주회를 앞두고 9일 리허설을 마친 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의 방문에는 “마에스트로(Maestro)의 방‚ 방해하지 말 것(Don’t disturb)”이라고 적혀 있었다. 방해꾼이 된 기자가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에 상임지휘자 겸 음악 감독으로 오기로 한 일에 대해 묻자 정씨의 기억은 대뜸 4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960년 서울시향의 공연에 일곱 살 꼬마가 피아노 협연자로 나섰다. 발은 피아노 페달에 닿지도 않았고‚ 손이라도 건반에 닿도록 이불을 꼬깃꼬깃 개켜 방석 대신 얹어두었다. 꼬마가 하이든 협주곡을 연주하기 위해 건반을 누르자 객석에선 웃음이 터져나왔다. 정씨는 “곡목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폭소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며 “그때부터 따지면 서울시향과의 인연은 45년째에 이르는 셈”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이달 하순 서울에 온다. 당초 알려진 것처럼 음악감독이 아니라 올해는 음악 고문(music advisor)으로 일한다.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은 내년에 새로 계약을 맺을 예정이다. 정씨는 “가장 먼저 할 일은 단원 오디션 참가와 부지휘자 2명을 선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부지휘자는 모두 외국 출신으로‚ 태국의 젊은 지휘자 번디트 운그랑시(33)로 결정됐고‚ 노르웨이 출신 지휘자를 또 한 사람 접촉 중이다. 클래식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할 서울시향 연주회 지휘는 아직 미정. “서울시향과 공식적으로 갖는 음악회는 내년 이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디션을 겸해 올해도 제가 지휘하는 음악회를 할 예정입니다.” 그는 “서울 시향에 대해 단원‚ 지휘자‚ 시의 지원이라는 3개의 축이 잘 맞는지 엄격하게 스스로 평가하고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인구 1200만명이 넘는 서울이라는 국제 도시에 세계적 수준의 오케스트라도‚ 상주 오케스트라를 둔 전용콘서트홀도 없다. “한국에는 능력을 갖춘 연주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클래식음악의 기반인 오케스트라는 세계 수준에 한참 못 미칩니다. 유럽과 미국 무대에서 지휘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한국의 오케스트라를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을까 고민했지요.” 정씨는 1997년 KBS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 감독을 맡았지만 1년도 못 가서 그만뒀다. “악단 조직과 운영 개선을 몇 차례나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정씨는 “좋은 오케스트라를 만든다는 것은 1년짜리 꽃이 아니라 수십년간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나무를 가꾸는 일과 같다”며 “긴 눈으로 보고 충분히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오케스트라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좋은 콘서트홀을 갖춰야 합니다. 단원들의 음악적 자질과 지휘자의 열정‚ 사회적 관심이라는 ‘3개의 축’이 빈틈 없이 맞아야 하지요.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몇 년 못 가서 쓰러지고 맙니다.” 프랑스의 청소년 음악 프로그램에 5년간 애정을 쏟고 있는 정씨는 서울시향도 어린이·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승인 줄리니로부터 음악적 성숙을 위해선 ‘시간이 걸린다’(It takes time)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정명훈은 누구? 1974년 정명훈은 피아노 부문에서 2등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출발‚ 25세에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이끄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부지휘자로 세계무대에 데뷔했다. 1989년 프랑스 국립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부임‚ 이 극장을 궤도에 올려놓으며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되는 등 팬들과 평단으로부터 고른 사랑을 받았다. 현재 산타 세칠리아 음악감독 및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고문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있다.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 등 세계적 음악가족인 정 트리오의 막내다.